건축사가나 비평가들에 의해 ‘장소’는 ‘공간’에 대한 문제와 더불어 건축과 도시를 논의하고자 할 때 빠질 수 없는 중요한 대상으로 자리 잡고 있다.

예를 들어 노베르그 슐츠(Norberg-Schulz)의 장소와 공간에 대한 논의와 인문지리학자인 이-푸 투안(Yi-Fu Tuan)의 장소와 공간에 대한 논의는 전혀 다른 관점이지만, 유사한 맥락을 공유하기도 하는데, 모두 장소와 공간에 대한 의미심장하고 진지한 논의들임은 분명하다.

노베르그 슐츠는 #이미지 #Image , #공간 #Space , #성격 #Character , #장소의혼 #Genius Loci 이란 체계를 통해 로마라는 장소에 대해*** 실증적인 해석보다 더 실증적이고 유용한 현상학적 가치 체계로 설명하고 있다. 이-푸 투안은 낯선 공간이 어떻게 하여 친숙해질 수 있으며, 기본적인 방향들의 적자에 의해 공간적 질서를 부여하려는 시도가 어떻게 하여 장소들의 패턴을 수립하는 것으로 귀결되는지를 논하면서(조직된 의미 체계로서 장소***), 공간이란 대상은 한정과 의미를 얻을 수 있을 때 #장소 라는 대상으로 변환***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 노베르그 슐츠(Norberg-Schulz) 저, 민경호 외 역, 『장소의 혼』(Genius Loci), p161~192, 태림문화사, 1996

*** 이-푸 투안 저, 정영철 역, 정 『공간과 장소』(Space and Place), P223, P167, 태림문화사, 1999

하지만 장소에 대한 이러한 진중한 논의들이 불과 몇십 년 지나지 않아 장소에 대한 전혀 다른 해석이 필요한 상황임을 우리는 일상생활 속에서 어렵지 않게 직면할 수 있다.

카페는 어떠해야 하며, 집은 어떠해야 하며, 미술관은 어떠해야 하며, 관공서는 어떠해야 하는지 등의 표현은 이제 누구나 말할 수 있고, 누구나 나름의 가치 평가를 할 수 있는 범주 속에 장소란 대상이 놓여 있다. 그리고 이러한 표현은 공간적이라기보다 분명 장소에 대한 표현일 것이다. 공간은 상대적으로 추상적이고 개념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지만, 장소는 구체적이고 친숙한 속성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대체로 추상적이고 개념적인 대상에 대해서는 표현을 주저하지만, 구체적이고 친숙한 대상에 대해서는 표현을 주저하지 않는다.

주택과 같은 개인적인 장소는 물론이고, 미술관이나 관공서와 같이 다중이 이용하는 대상의 장소에 대해서는 그 표현에 있어 더욱 주저함이 없다. 그리고 카페와 같은 상업적인 목적의 장소에 대해서는 수많은 표현이 교차함을 인지할 수 있는데, 일상생활과 밀접할수록 표현은 구체적이고 다채로울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양상은 소위 문화라는 층위를 만들기도 한다. 물론 슐츠와 이-푸 투안이 장소에 대해 논의하던 시절에도 문화는 분명 존재했었지만, 현대의 문화적 개념과는 그 양상이 질적으로 다르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달라진 양상이 어떤 것인지 #피렌체 #Firenze 에 있는 ‘ #베키오 다리 #Ponte Vecchio ’를 일례로 들어 본다.

베키오 다리(Ponte Vecchio), 피렌체(Firenze)
사진출처 : 비온후풍경


피렌체를 흐르는 아르노강 위에 10개의 다리 중 가장 오래된 다리가 베키오 다리이다. 강폭이 가장 좁은 이곳에는 로마 시대부터 나무다리를 설치해서 시민들의 통행을 돕도록 했으나, 홍수로 다리가 자주 유실되자 1350년 지금의 석재 교량을 완성하였다. 1442년 많은 사람이 지나다니는 다리 위 양쪽에 점포를 만들어서 정육점, 가죽 가공점, 철공소 등 상인들이 장사할 수 있도록 했는데 비좁은 공간 탓에 상인들이 제각각 임의로 공간을 늘리다 보니 외관상 다소 불규칙한 모습으로 변해버렸다고 한다. 그리고 1549년 아르노강 건너편에 있는 피티 궁전(Palazzo Pitti)이 완성되자 베키오 궁전(Palazzo Vecchio)에서 옮겨간 코지모 1세는 자신의 신변 보호와 베키오 다리를 거쳐서 두 궁전을 오갈 때마다 상인들과 뒤섞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점포 위에 전용 통로를 만들면서 다리 위 점포는 증축하게 된다. 점포 위 통로는 피티 궁전에서 지금의 우피치 미술관(당시 메디치가의 집무실)까지 이어진 비밀 통로인 회랑이다. 그 후 1593년 베르디나도 1세는 베키오 다리 1층 상점에서 풍기는 도축장의 고기와 가죽 냄새가 싫다고 그들을 대신하여 냄새를 풍기지 않는 금은세공 상인들을 입주시키게 되는데, 이로써 베키오 다리는 피렌체의 고급 쇼핑거리로 변모하게 된다. 2차 세계대전 당시 피렌체에서 퇴각하는 히틀러조차 아르노강의 다른 다리는 모두 폭파하지만 베키오 다리만큼은 남겨두고 철수했다. 여기까지는 베키오 다리에 대한 역사적 사실이다.

하지만 베키오 다리가 사람들로부터 많은 관심의 대상이 된 것은 이러한 역사적 사실 때문이 아니라, 단테의 영원한 사랑인 베아트리체와의 만남의 장소로 회자되기 때문이다. 사실 베키오 다리가 단테와 베아트리체와의 만남의 장소였다고 해서 앞서 언급한 역사적 사실이 달라지거나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현재 베키오 다리는 이러한 역사적 사실 여부와 무관하게 전혀 다른 대상으로 사람들에게 인식되고 있다.

다시 말해 현재의 사람들은 이-푸 투안의 방식처럼 공간과 장소를 조직하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슐츠의 로마를 해석하는 방식처럼 피렌체의 베키오 다리를 해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사회과학자들이 해석하는 – 오직 인간에게만 발달한 – 소위 문화라는 층위로 장소를 인지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문화라는 층위는 경험이나 지식의 범주로도 설명하기 어렵다.

쉽게 말해 #건축 이나 #도시 의 대상을 #기호화 된 #장소 로써 인지하는 경향이 다분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기호화된 장소는 멀리 있는 베키오 다리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 가까운 곳에서 얼마든지 일어나고 있는 현실이다.

어느 어촌마을의 빈집이나 폐가에 가까운 오래된 주택을 소위 감성적인 가구와 빈티지한 인테리어 컨셉 등을 강조하며, 리모델링을 통해 소규모 상점이나 까페, 펜션 등으로 활용하는 사례는 우리에게 낯선 장소들이 아니다. 이러한 장소는 소위 #디자인 과 결합한 #기획 이란 행위를 통해 웹 브라우저 정중앙에 풀 사이즈 사진과 감성적인 스토리 라인(Story Line)이 가미된 #텍스트 가 더해져서 오래된 주택이란 장소는 전혀 새로운 장소로 – 그리고 장소가 아닌 #콘텐츠 로 – 이미지화한다. 그리고 이미지화한 동시에 또 다른 대상으로 재생산되는데, 어느 숙박 예약 플랫폼 한쪽에서 검색 키워드와 함께 가상의 세계에서 부유하고 있는 것이다. 사용자가 플랫폼의 댓글을 참고한 후 예약 버튼을 클릭하는 것에 주저함이 없도록 해야 하며, 주저함 없이 클릭하게 하는 만드는 것이 현대의 건축술이 고려해야 하는 목적이 되기도 한다.

사실 이러한 주택의 공학적 관점에서 사실관계는 건축물의 안전에 대한 그 어떤 검증 과정도 거치지 않은 위험한 건축물이다. 균질한 백색 벽면 위에 노출된 오래된 목재 서까래는 구조적으로 매우 불안정한 경우가 대부분이며, 지진과 같은 외부의 물리적 요인에 매우 취약한 건축물이다. 대부분의 소규모 리모델링의 경우 애초부터 구조계산서 등이 필요한 건축 인허가 대상을 피해 기획된다. – 합당한 절차를 통해 진행하고자 해도 현행 법규상의 문제로 행위 자체가 불가한 경우가 많은 것도 문제이다 – 하지만 이러한 현실(Reality)은 감성적인 가구와 빈티지한 인테리어 이미지가 가지는 가치의 유용성보다 실효성이 없는 대상으로 전락하기에 십상이다.

이러한 소위 문화적 가치와 이를 상품화하고자 하는 영리한 건축주는 디자인 행위가 탐닉할 수 있는 #형식미 를 첨가하여, 장소를 #소비 의 대상으로 #상품 의 반열에 올려놓기에 주저함이 없다. 그리고 영리한 건축가는 #건축술 을 #형식화 #코드화 하여 장소를 통해 소비되는 기호체계에 부합하고자 한다. 이러한 행위는 대상을 단순히 기호에 머물지 않고 #문화 라는 담대한 현상으로 발현함에 종속되는 것이기도 하다.

단테의 운명적인 사랑이 시작된 베키오 다리에서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고 증표로 자물쇠를 채운 뒤 열쇠를 강물에 버리는 이벤트는 상품화된 문화라는 범주에서 건축이 형식화, 코드화 되는 양상과 유사한 양태라 할 수 있다. 여기서 건축의 형식화, 코드화 양상이란 관점이 다소 해석의 모호성이 있을 수 있다. 이러한 건축의 형식화, 코드화를 가장 쉽게 설명해 줄 수 있는 것이 ‘ #가부키 (歌舞伎, 가무기)’라는 일본의 전통 연극이지 않을까 한다.

가부키는 17세기 초 무녀 오쿠니가 여성 극단을 데리고 큰 흥행을 거두면서 사람들을 매료시키게 된 것을 기원으로 하고 있다. (오쿠니 가부키) 이후 오쿠니를 본뜬 여성 중심 극단이 빈번하게 되었으나, 유녀를 겸하고 있는 이유 등으로 풍기문란이 끊이지 않자, 막부는 여성 가부키를 금지하기에 이른다. 이후 여성 배우 대신 미소년들이 여장하고 무대에 나서 (와카슈 가부키) 여전히 흥행을 거두었으나 이 역시 남색 등의 풍기문란으로 금지당하고, 청년 남자라는 연기자, 복장 및 내용 제한 등의 조건을 걸고 지금의 가부키 (야로 가부키)에 이르고 있다. 이러한 가부키는 내용이나 극의 줄거리보다는 형식미 그 차체로 전성기를 누렸다고 할 수 있다. 대략 짐작할 수 있듯이 내용, 줄거리, 의미 등의 대상은 우리나라 아침 드라마와 같이 뻔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가부키는 전혀 다른 차원의 매력을 가지고 있는데,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내용과 줄거리보다 ‘ #표현방식 을 즐기는 것’이다.

다시 말해 상품화된 문화라는 범주에서 건축은 가부키처럼 ‘표현방식을 즐기는 대상’이라는 점에서 형식화, 코드화되었다고 언급하는 것이다.

영리한 건축주와 건축가는 어떤 방식으로 장소를 만드는 것이 많은 사람이 관심을 두고 공감할 수 있는지에 대해 집중한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종종 건축가는 철저히 배제되기도 한다. 언젠가부터 등장한 공간디자이너, 스타일리스트, 마케터, 기획자 임을 자부하는 이들이 이러한 장소를 만드는 영향력 있는 주체로 등장하고 있다. 이러한 네트워크 속에서 건축은 다분히 하드웨어적인 대상으로 전락하기도 한다. 이들이 주된 목적은 소위 장소라는 상품을 만들고자 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기대하는 유일한 의미 작용은 소비 – 여기서 소비는 화폐 위주의 경제적 소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 라는 행위가 일어나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인스타용 포토존이란 관점이 기획이 건축에 요구하는 중요한 프로그램 중 하나가 된다.

심지어 이론적으로만 존재할 것 같았던 건축이란 대상의 복제 행위가 일상 현실에서도 나타난다. ‘ #웨이브온 커피(Waveon Coffee)’라는 건축물을 그것도 그렇게 멀지 않은 장소에 그대로 복제한 사례가 있다. 소위 장사가 잘 되는 공간과 장소에 대한 형태적 복제가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저작권이란 법적 문제를 논하기 전에 건축 또한 기호를 통해 복제되고 있는 시대임을 반증하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소송 중인 사항이고 세부적인 인과 관계는 법정에서 다투어져야 하겠지만, 두 장소를 실제 방문해 본다면 상식적인 관점에서 무엇이 문제가 되는지를 어렵지 않게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건축가의 관점에서 이러한 현대의 문화 상품적 가치로 인한 건축에 대한 요구는 표면적으로 다소 불편한 요구라고 생각할 수 있을지 모른다. – 왜냐하면, 이전의 건축은 역사적으로 한 번도 상품이란 대상이 되어본 적이 없다. 현대의 많은 건축가가 역사적 연장선에서 건축 자체의 모습에 대한 당위성을 찾고자 하지만, 현실적 환경에서 건축의 올바른 가치체계를 참고할 만한 마땅한 모델이 없다는 점에서 고민스러워한다. 하지만 이는 매우 당연할 수밖에 없다. 아쉬운 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축 자체의 문제로 건축의 정체성을 찾아 나가야 함이 타당하겠지만, 소극적인 건축가들이 피난처로 삼은 것은 건축 자체가 아닌 예술이다. 좀 더 엄밀히 말하자면 외국의 경우 건축가의 영역이 산업과 융복합되어 건축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지만, 우리의 건축가는 다소 한정적인 영역에 머물러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다소 극단적인 표현으로 예술 지향 주의 건축가와 행정 대서사인 허가방으로 극단적으로 양분화되어 있다. – 그래서 건축가는 건축에 예술이란 필터를 장착하여 다소 불편할 수도 있는 상품화에 대한 요구를 합리적으로 묵시할 수 있는 적당한 울타리를 확보하는 것이다.

예술 또한 화랑에서 거래되는 작품만 공인된 미술품으로 전락한 마당에 건축에 필터링 된 건축예술은 문화 상품이란 불편한 대상을 화랑의 미술품과 동일시 할 수 있는 명분을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 #예술 은 가장 손쉬운 피난처이다 – 어쨌든 이러한 이중적인 모습 때문인지 일반인들이 느끼고 생각하는 장소에 대한 현실과 #건축가 가 설명하는 장소에 대한 설명은 전혀 다른 대상을 설명하는 것처럼 들려진다. 그리고 문화 상품이란 관점에서 같은 대상에 대한 이러한 이중적인 잣대는 별 중요한 문젯거리도 아니다. 영화 평론과 영화의 흥행은 별개의 문제이며, 때에 따라 노이즈 마케팅처럼 이중적인 잣대는 오히려 좋은 홍보 수단이 되기도 하는 시대이다.

비온후풍경 / OGL Architects, 고성 부띠크빌라 까사델아야
사진출처 : https://genius-partners.com/사 델 아야


과거의 건축은 회화와 비교되어야 하는 시대였지만, – 그 이전에는 건축이 굳이 회화 등 다른 분야와 비교될 필요가 없었던 시대였다 – 현재의 건축은 영화와 비교되어야 하는 시대이다. 영화와 비교되어야 하는 점 자체가 건축은 기호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 실재하는 감독과 배우가 있을지 모르지만, 영화 자체는 실제 존재하지 않는 가상에서만 존재하는 대상이다 – 건축과 영화의 가장 큰 공통점은 #산업화 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며, 가장 큰 차이점은 실재하는 대상과 실재하지 않는 대상이라는 점이다.

기호화된 건축이란 대상이 바람직한지 바람직하지 않은지에 대한 논의는 – 과거의 건축이 어떠한 역사적 맥락에서 존재했든지 간에 – 무의미한 논의이다. 우리가 논의해야 할 대상은 건축이 – 건축과 건설은 구분이 필요하다 – 영화산업처럼 산업화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 그 자체에 대한 문제의식이다.

하지만 우리의 건축가들은 안타깝게도 전혀 다른 관점에 주목하는 경향이 있다. 화랑에서 유통되는 작품을 통해 일정한 지위와 명예, 명분을 얻는 작가가 되기에 우선 관심이 있으며, – 화랑에서 유통되는 미술품이라고 해서 모두 예술작품이라고 단언할 수 없다. 화랑의 작품 또한 문화 상품의 속성에서 벗어날 수 없다. – 건축산업의 발전보다는 영화산업의 부산물로 창조된 영화감독과 배우들의 지위와 명예, 명분에 더 많은 관심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건축계에는 한국에서 프리츠커상을 받는다면 아마 내가 받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분들도 계실 것이고, 나의 목표는 프리츠커상을 받는 것이라고 호기롭게 이야기하는 분들도 있으며, 정부는 프리츠커상을 목표로 젊은 건축가들을 해외로 연수 보내겠다는 정책을 발표하기도 한다.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주목해야 할 것은 프리츠커상을 위한 ‘주체’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공간과 장소, 건축 그 자체인 ‘대상’이다. 특히 (장소와 건축이 문화라는 범주에서 기호로 환원될 수밖에 없는 대상임을 부인할 수 없지만) 건축은 건축의 모든 것을 기호로 환원할 수 없는 속성을 아직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스타일에 대하여”라는 단락에서 우리 현실 사회에서 나타나는 기호학적 현상은 사실 맹목적이고 기계적인 복제에 가까운 B급 문화이며 기계적인 코드에 가깝다고 언급한 바 있다.

유심히 살펴보면 제주도 어느 어촌마을 리모델링 주택의 모습은 서울 북촌 한옥마을 민박집에서도 볼 수 있는 풍경과 크게 다르지 않으며, 연남동 주택을 개조한 어느 카페의 모습과 망미동 주택을 개조한 어느 카페의 모습은 사실 크게 다르지 않다. 가끔 새롭게 보이는 인테리어 디자인이 눈을 사로잡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얼마 되지 않아 그조차 어디서든 볼 수 있는 고만고만한 실내장식으로 전락하는 예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하지만 가상 현실에서는 – 이러한 실제의 모습과 무관하게 – 실제의 모습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구현되며, 다채롭기까지 하다. 이러한 이유는 #사진 과 #이미지, #텍스트 등으로 구성된 시뮬라크르(simulacra)의 착시 효과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웹 브라우저 속에서 설렘을 기대하고 클릭하지만, 실제 방문하여 실망하는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시뮬라크르의 상품적 가치를 맹신하면서 공간과 장소에 대해 스타일이란 개념으로 치환하고자 하지만, 그렇게 만들어진 카페와 숙박시설 모두가 장사가 잘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장사가 잘되는 경우보다 그렇지 못한 비율이 훨씬 높다. 무엇보다 맹목적이고 기계적인 재현이나 복제의 대상은 우리가 기대했던 의미 작용을 일으키지 못하는 경우가 훨씬 많다는 것이다. 설령 정밀한 복제를 통해 기대했던 의미 작용에 성공했다고 하더라도, ‘웨이브 온 커피(Waveon Coffee)’를 복제한 건축물과 같이 철거 위기에 봉착할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슐츠와 이-푸 투안의 장소에 대한 논의는 여전히 유용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슐츠와 이-푸 투안의 장소조차 머지않은 미래에 이마저도 기호로 환원될 수 있을 만큼 과학기술이 진보하는 날이 도래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당분간 모든 것을 기호로 환원할 수 없는 대상 중 하나가 건축이라는 것이며, 이것은 건축의 고유성에 대한 반증일 것이다.

그리고 ‘실재함’의 중요성 중 하나는 가상에 대한 맹목적이고 기계적인 가치 추구는 피렌체의 베키오 다리와 같은 관광 산업을 창출할 수 있는 동력이 미흡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단테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단테의 신곡이 있었기 때문에 베키오 다리에 대한 스토리텔링 또한 힘을 발휘하는 것이다. 피렌체와 베키오 다리에 대한 이미지는 실재하는 사실, 실재하는 작품이 있었기에, – 피렌체의 역사, 문화, 수많은 건축 및 예술작품 등이 실재하기 때문에 – 이미지를 넘어 (관광) 산업화할 수 있는 지속적인 원동력을 갖는 것이다. 물론 베키오 다리의 자물쇠는 가까운 남산 타워에서도 볼 수 있는 풍경이지만, 함축된 기저의 맥락은 엄연히 전혀 다른 대상이다.

공간과 장소라는 건축적 대상 또한 ‘형식미’만을 향유하는 방식으로는 건축의 유용한 존재 가치를 설명하기 부족할 것이다. 건축 또한 산업화의 대상임을 인지해야 하며, 기계적인 관점의 기술이 아닌 소위 인문학적 #기술 이란 관점에서 기술에 대한 가치를 건축적 면면에 다양한 방식으로 녹여낼 수 있을 때 산업화한 건축은 비로써 인문학적인 건축의 힘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물론 가부키처럼 극단의 형식미(formality)의 가치를 추구할 수 있는 건축 및 건축가의 역량도 필요하다. 이왕 이러한 관점으로 접근하고자 한다면, 조형 예술(formative arts)과 같은 예술의 범주가 아니라, 건축 자체의 모습으로 건축 극단의 형식미를 보여줄 수 있다면 더 의미 있지 않을까 한다. 그리고 이러한 건축적 형식미라는 것이 아마도 건축이 산업화하지 못하면 사실상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을 것이다. 아부다비의 《루브르 아부다비(Louvre Abu Dhabi)》를 조형 예술적 관점으로 접근하는 것은 잘못된 접근 방법이다. 물론 《루브르 아부다비(Louvre Abu Dhabi)》를 건축의 극단의 형식미라고 접근하는 것도 오류가 있을지 모르지만, 분명한 점은 건축이 산업화하지 못하면 결코 지을 수 없는 건축물이라는 점이다.

그림입니다.

원본 그림의 이름: CLP00003c4016e0.bmp

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2400pixel, 세로 1802pixel
장 누벨(Jean Nouvel), 루브르 아부다비(Louvre Abu Dhabi)
사진출처 : http://www.jeannouvel.com/


아뜰리에 비온후풍경 / OGL Architec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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