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 이란 용어와 개념은 #모더니즘 이란 범주와 그 궤를 같이하고 있다. 다시 말해 근대라는 역사를 통해 등장한 개념이 디자인이란 대상이다. 우리에게 디자인과 #설계 라는 개념은 우리의 사회적 환경에 의해 다소 다른 뉘앙스로 사용되고 있지만, 본래 디자인과 설계는 같은 의미이다. 즉, #건축디자인 #Architectural Design 과 #건축설계 #建築設計 는 같은 뜻이라는 점이다.

디자인이란 표현을 사용하는 분야들의 관련 서적을 보면, 디자인의 역사와 일반적인 역사는 동일한 대상을 기술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쉽게 말해 건축디자인(Architectural Design)의 역사(History)는 건축사(Architectural History)와 같다는 것이다. 르네상스 시대 건축물을 지을 때 건축가는 디자인이란 관점에서 건축물을 지은 것은 아니지만, 건축디자인의 역사는 르네상스 시대의 건축물을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물론 건축가 또한 지금의 건축가와 그 시대의 건축가는 다른 개념이다. 건축이란 행위는 근대라는 시대로 접어들면서 디자인이란 개념의 등장과 더불어 건축디자인의 시대를 맞이했다고 할 수 있다.

주목할 점은 이러한 디자인이란 개념의 등장 과정은 근대화라는 사회발전 단계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점이다. 과학기술의 발달과 산업혁명의 연장선에서 대량생산체계와 자본주의 사회로 진입하는 과정에서 디자인이란 개념이 등장하고 있다. 이 시대의 사회적 변화 양상은 예술사의 표현을 빌리자면 한마디로 #아방가르드 #avant-garde 그 자체이다. 모더니즘은 과거와 전혀 다른 양상으로의 사회가 태동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모더니즘은 역사적으로 연속된 대상이지만, 그 양상은 단절에 가깝다고 해야 한다. 한마디로 과거와는 전혀 다른 세상이 도래한 것이다. 우리는 지금 모더니즘 범주의 시대를 살고 있으므로 체감하기 어렵지만, 모더니즘은 혁신이란 말로도 설명이 부족할 만큼 과거와 현격히 다른 시대를 의미한다. 그래서 디자인이란 말의 뉘앙스에는 ‘새롭고’, ‘혁신적이며’, ‘창조적인’이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건축디자인이란 개념 역시 모더니즘 이전의 건축이 추구했던 가치, 방법, 목적 등과는 전혀 다른 관점에서 건축디자인이란 개념이 정립된 것이다. 사실 지금 우리가 바라보는 과거는 대부분 모더니즘의 관점에서 과거를 바라보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모더니즘 이전과 이후의 달라진 건축 양상에 관한 내용을 설명하는 것은 만만치 않은 분량일 것이다. 용감하게 압축해 보자면 모더니즘 이전의 건축적 양상을 축약해서 ‘헤파이스토스(Hephaistus)적’ 건축이라고 비유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알려진 바와 같이 헤파이스토스는 그리스 신화의 기술, 대장장이, 장인, 공예가, 조각가, 금속, 야금, 불의 신이다. 제우스와 헤라의 적장자이며, 사랑과 미의 여신인 아프로디테가 그의 아내이다. 더불어 모더니즘 이전 건축의 또 하나의 양상을 ‘로고스(Logos)’적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데, 말이란 뜻과 함께 이성이란 의미로 통용될 수 있다. 한마디로 모더니즘 이전의 건축을 ‘로고스적 헤파이스토스’라는 의미로 압축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다시 말해 ‘법칙 혹은 이성을 근간으로 한 제작’의 의미가 모더니즘 이전 건축의 주요한 관점이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모더니즘의 범주에서 건축 및 건축디자인의 양상을 설명하는 것 또한 만만치 않은 영역이다. 책 한 권으로도 부족할 만큼 방대한 내용이겠지만, 다시 한번 용감하게 압축해 보자면 한마디로 ‘분화’ 이지 않을까 한다. 근대화를 통해 공예, 가구, 건축, 도시, 조경, 인테리어, 엔지니어링 등 소위 전문 영역이라는 것이 세분화하여 발전하게 되었고, 모든 분야에 전문가 시대가 도래하게 된 것이다. 전문가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현재의 양상은 사실 모더니즘의 대표적인 속성 중 하나이다. 이러한 전문성의 도래는 각 분야의 각자가 최고의 기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고려된 방식으로, 이러한 맥락은 자본주의 사회의 ‘분업’이란 양상과 맞물려 있기도 하다. 분업이란 능률적이고 최고의 기능을 추구하고자 고안된 장치이다. 새로운 모더니즘 시대 새롭게 변모한 건축이 첫 번째로 선택한 화두 역시 #기능주의 였다.

그래서 디자인의 대상으로 설정하고 있는 계획, 제안, 결과, 제작, 방법론 등은 합리성, 효율성, 실용성, 기능성 등과 같은 모더니즘적 가치를 근간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모더니즘의 시대적 배경에서 연유한 새롭고 이성적인 가치 중심의 창조성 또한 디자인이란 속성에 내재하게 된다. 하지만 모더니즘은 반백 년이 지나기도 전에 ‘포스트-모던’이니 ‘탈-모던’이니 ‘해체’니 하면서 모더니즘의 문제점을 하나둘씩 성토하기 시작했다. 효용과 효율 중심의 극단의 기능주의는 당연히 피곤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불, 기술, 장인 등의 개념을 상징하는 헤파이스토스는 모더니즘에 의해 개별 분야들의 #전문가 들로 분해, 대체되었다. 모더니즘 이후 시대에 장인이 없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더불어 헤파이스토스와 같이 살던 시절에도 팜므 파탈(femme fatale)이었던 아프로디테는, 모더니즘으로 인해 당당한 미망인이 되어 예술이란 새 애인과 함께 제2의 인생을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모더니즘으로 인한 헤파이스토스와 아프로디테의 이별의 의미는 건축에서 디자인의 영역과 공학 및 건설의 영역, 예술의 영역이 등이 각각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모더니즘을 통해 이전 건축가들과 전혀 다른 의미의 디자인 #전문성 을 갖춘 #건축가 의 모습으로 대체 된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디자인 전문가로서 건축가의 모습은 매우 합리적이고 효율적일 듯하지만,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현대의 건축가들은 건축가라는 동일한 명칭으로 타이틀을 공유하고 있지만, 저마다 전혀 다른 전문성의 양상으로 나타나게 된다. 일반인들에게는 똑같은 건축가라고 보이겠지만, 천차만별의 건축가들이 있음을 집짓기 전에 알 수 있어야 한다.

모더니즘이 야기한 소위 전문가 시대는 얼핏 보면 이상적이고 합리적으로 보이지만, –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각 분야의 최고의 기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설정된 소위 전문가 시스템을 기반으로 한다는 점에서 – 한편으론 치명적인 오류와 약점을 가지고 있다. 모더니즘의 전문성은 분업과 협업 시스템 속에서 유효한 전문성이지, 분업과 협업 시스템을 갖추지 못한다면 전문성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다는 약점을 가지고 있다. 쉽게 말해 대량생산체계를 위한 시스템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모더니즘을 근간으로 한 사회라고 할지라도 모든 사회적 대상이 대량생산체계를 갖춘 시스템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분업과 협업 시스템 중 가장 합리적이어야 할 행정조직과 같은 시스템은 대량생산체계를 갖추었음에도 전혀 합리적이지 못하며, 오히려 적폐의 대상으로 전락하기도 하는 오류가 있음을 인식하게 해주고 있다.

그리고 세분된 분야만큼 우선 너무 많은 전문분야와 너무 많은 전문가를 양산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누가 전문가이며, 왜 전문가인지 등을 구분하기도 쉽지 않다. 소규모건축물 시장에서도 무수히 많은 전문가가 존재하지만, 그들이 전문가인지 아닌지도 구별하기 어려우며, 어떤 전문가이며 전문가로서 수준은 어느 정도의 수준인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전문가 시대가 아니라 자격증 시대인 것이다.

소규모건축물 시장에서 현대건설 10년 경력, 정림건축 10년 경력이 암시하는 전문성은 (그 조직에서는 전문가였는지 모르지만) 소규모건축물 시장에서는 전혀 전문가일 수가 없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시스템이 없으면 무기력할 수밖에 없는 전문성이 모더니즘의 전문성이며, #시스템 이라는 것이 만능일 수도 없다는 것이 모더니즘의 오류이기도 하다.

헤파이스토스와 아프로디테의 이별을 통해 탄생한 건축디자인의 모습은 기대했던 이상적이고 합리성의 종결자란 모습보다 개별 영역으로 나뉘어 서로를 그리워하며 다중적인 관계성을 맺게 되는데, 그 모습이 일종의 #반인반수 #半人半獸 의 모습처럼 보이기도 한다.

반인반수라는 개념이 통상 부정적인 뉘앙스를 갖는 개념이지만 신화 속의 반인반수 중에는 현자로 묘사되는 케이론(Chiron)과 같은 반인반수도 있으며, 왕권을 상징하는 스핑크스와 같은 반인반수도 있고, 매력적이고 신비한 개념으로 묘사되는 세이렌(Sirens)과 같은 반인반수도 있다. 사실 반인반수라는 이미지에는 이데올로기적 이미지가 덧씌워져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이집트의 스핑크스는 선한 자들의 수호신이지만, 그리스의 스핑크스는 이집트에서 보낸 괴물로 여겨지며, 목을 졸라 죽이는 자라는 의미가 있다. 반면 신과 인간의 반신반인(半神半人)은 그리스 신화에서 대부분 영웅으로 묘사되고 있는 점 등은 다분히 이데올로기적이라 할 수 있다.

어쨌든 모더니즘을 통해 도래한 반인반수적 건축디자인은 역사적 변증법이란 개념으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일종의 #이종교배 나 #형질전이 와 같은 생물학적 범주의 유전자 변형의 결과라고 해석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한다. 즉 로고스적 헤파이스토스라는 의미의 전통적인 건축과 모더니즘의 이종교배 결과가 현대의 건축디자인의 모습일 수도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어쩜 팜므 파탈이었던 아프로디테에 대한 복수로 헤파이스토스는 모더니즘이란 유전자를 이식하여 형질전이한 모습이 현대의 건축디자인의 모습일 수도 있는 것이다.

《집합적인 발명(Collective Invention), 마그리트(Rene Magritte), 1935》

《클림트(Gustav Klimt), 인어들(Mermaids), 1899》



그래서 모더니즘을 지나고 있는 현대의 건축디자인은 다양한 유전자적 조합을 기반으로 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모더니즘이 숨겨왔던 이러한 #다중성 은 유전자의 조합에 따라 하반신은 말의 모습이고 상반신은 인간의 모습인 형상은 똑같지만, 한쪽은 야만적이고 폭력적인 괴물을 묘사되는 켄타우로스(Centauros)가 될 수도 있고, 다른 한편으론 현자로써 수많은 영웅의 스승된 케이론(Chiron)이 될 수 도 있는 것이다. 모더니즘은 숭고한 로고스를 통해 창조적인 합리성을 지향하고자 했지만, 그 의도와 달리 결과적으로 다중인격장애라는 희귀한 정신병도 가지고 있음이 밝혀졌다. 모더니즘의 정점에서 모더니즘을 대표하는 도시인 뉴욕을 정신착란증적이라고 표현한 렘 콜하스의 맥락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러한 서양의 모더니즘이란 배경과 더불어 우리에겐 독특한 역사적 상황이 덧붙여져 있다. 지금까지 설명한 이러한 소위 모던성은 우리가 스스로 받아들이거나 개척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지와 무관하게 일제강점기란 역사를 통해 이식된 개념이라는 점이다. 식민지의 대상이었던 우리에게 모던성의 가치가 오롯이 전달되었을 리도 만무하고, 일제의 모던성 또한 서양의 모던성과 조금 다른 버전의 모던성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러한 왜곡의 절정은 해방 후 소위 조국 근대화 과정에서 또 한 번 치명적인 번역 오류들로 점철 지게 된다.


한마디로 대한민국 집짓기에서 디자인(설계)과 건축가란 대상은 혼란스러운 대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는 디자인(설계)과 건축가만의 문제가 아니라 목수부터 동네 집 장사, 공무원, 정치인까지, 그리고 무엇보다 나 자신도 마찬가지인 상황일 것이다.

아뜰리에 비온후풍경 / OGL Architec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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