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 방송국에서 방송 중인 프로그램 중에 ‘투유 프로젝트-슈가맨을 찾아서’ 줄여서 ‘슈가맨’이란 프로그램이 있다. 한때 큰 인기를 끌며 풍미했지만, 자취를 감춘 가수, 일명 ‘슈가맨’을 찾는다는 포맷이다. 슈가맨은 멕시코 이민자 출신 로드리게스란 가수가 미국에선 무명가수였으나, 남아공에서 국민가수가 되었던 실화를 2012년 다큐멘터리로 영화화한 <서칭 포 슈가맨>이란 영화를 모티브로 하고 있다.

호불호가 다를 수 있겠지만 로드리게스의 삶을 다룬 영화만큼의 감동은 아닐지라도, 한때 인상적인 노래를 남기고 사라진 추억의 가수를 다시 만난다는 즐거움이 있는 프로그램이다. 그리고 성공과 실패의 희로애락 속에서 이제는 인기스타가 아닌 평범한 슈가맨의 이야기와 함께 그 시절 감정의 추억을 기억하는 이들이라면 함께 공감할 수도 있다. 물론 다소 뜬금없는 추억 팔이라는 비판도 있지만, 보는 이들에 따라 추억의 시간과 장소를 기억할 수도 있다. 말하고자 하는 바는 추억이 아닌 ‘기억 Memory’이다.

양양 펜션 비온후풍경 ⓒ 김재경

짙은 #합리성 의 그림자로 뒤덮인 요즘 같은 세상에서 집짓기는 지식과 정보, 효율성과 경제성, 형태와 디자인, 부동산과 상품 등과 관련된 생각들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런데 만약 이러한 것들이 정말 합리적이라면 이러한 것들만으로 우리는 얼마든지 행복한 집짓기가 가능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집짓기는 행복하지 않은 경우도 종종 있고, 무엇보다 시작부터 고민투성이며, 과정은 다소 무미건조하기도 하며, 결과는 때때로 참담하기도 하다. 혹시 중요한 사실을 빠트리진 않았을까 하는 충분한 합리적 의문을 가져볼 수 있다.

집짓기에서 흔히 생각하는 합리성이란 ‘싸고 좋은 집을 짓는 것’을 의미하는 경우가 대부분인 듯하다. 이러한 생각 때문인지 우리의 집짓기는 녹색 검색 창과 더불어 길지 않은 시간 동안 각종 지식과 정보로 무장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경향이 농후하다. 그리고 대부분 지식과 정보의 최종 종착지는 #평당건축비 와 #예쁜집 으로 귀결된다. 이 외에도 각종 박람회와 세미나 등 소위 정보공유의 장 또한 집짓기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과정이다. 집짓기의 A부터 Z까지 전문가도 쉽지 않게 생각하는 주제들을 어렵지 않게 통달할 수 있는 정보화 시대에 사는 덕분일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합리성의 그림자 속에서 왠지 허전함을 제거하기는 힘들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이번에는 소위 인문학이란 바다에서 외로운 집짓기의 허전함을 달래보기도 한다. 하지만 결과는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집짓기에 있어 성경과 같은 절대적인 믿음을 기대했을지 모르지만, 남아 있는 것은 부유하는 표상들일 뿐이다. 물론 약간의 마음의 위안을 얻을 수 있다.

합리성의 가치를 추구하고자 하지만, 생각들을 막상 정리해 보면 상호 가치가 상충하는 예도 빈번하며, 때에 따라서는 새롭고 편리한 가치보다 오래된 가치를 더 선호하기도 하는 역설적인 생각들도 빈번하다. 한마디로대중은 ‘정상적이고도 특이한 건축’을 요구하기 마련인데노베르그 슐츠 저, 정영수 역, 『건축론』, 세진사, 1999, p.13~14., 일종의 ‘합리성의 오류’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요점은 대부분의 집짓기에서 우리는 소위 합리성이란 명분에 근거해서 어떤 행위와 가치를 추구하지만, 이러한 합리성이 집짓기의 모든 어려움을 해결해 줄 수 있는 만능의 잣대가 아니라는 점이다.합리성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또 다른 가치들이 우리의 집짓기에 필요한 법이다. 합리성은 모더니즘의 대표적인 속성이지만, 합리성은 모더니즘적 결핍의 또 다른 표현일 수도 있다.

정작 중요한 것은 집에 대한 내 생각과 가치의 발견이 필요하다. 이러한 생각과 가치의 발견이 중요한 이유는 인식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그렇다면 집에 대한 내 생각과 가치의 발견은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다소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의외로 어렵지 않을 수도 있다. 간단한 상상과 구체적인 경험이면 충분할 수도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비가 내리는 날에도 비를 맞지 않는 테라스가 있었으면 좋을 것 같다. 라는 생각이다. 어릴 적 부모님과 종종 방문했던 외갓집 시골 풍경도 좋고, 꼭 집이 아니라도 인상적이었던 공간이나 장소에 대한 간략한 묘사도 좋다. 선호하는 가구 스타일과 구체적인 사용 패턴에 대한 생각도 좋고, 조금 생소하지만, 반려묘를 위해 문에 작은 구멍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좋다. 겨울철 화장실 문을 열면 느껴지는 한랭한 느낌이 싫다는 것도 좋고, 실내 화분에 일일이 물 주고 관리하기 힘들므로 아예 화단을 만들어 보면 어떨까 하는 상상도 좋다. 그리고 이러한 다소 감성적인 접근 이외에도, 지금은 아이들이 어려서 상관없지만, 아이들의 성장과 더불어 필요에 따라 적절한 기능을 고려할 수 있는 가변적인 공간에 대한 요구도 한 번쯤 해 봄 직한 생각이다. 더불어 집의 생애주기와 관련된 비용 계획 등과 같이 논리적인 생각들도 집에 대한 가치를 발견하는 중요한 생각 중 하나일 것이다. 쉽게 말해 집과 관련된 소소하지만, 구체적인 생각들을 포함하여 자유롭게 상상해 볼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들은 자연스럽게 내가 생각하는 집에 대한 표상들로 정리해 볼 수 있다.

이러한 일상의 소소한 생각들과 더불어 오래된 옛것들로부터 전해오는 알 수 없는 감각의 흔적에 대한 생각들 있을 수 있다. 우리에겐 무속신앙에 대한 불신이 있어서인지, 이러한 #오래된것들 에 대한 지각과 감각에 대해 다소 미신적인 경향으로 치부해 버리곤 한다. 하지만 부인할 수 없는 것 중 하나는 이러한 옛것들의 흔적이 그렇게 낯설게만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리고 때에 따라 오히려 적지 않은 마음의 안온함을 가져다주고 있음을 발견할 수도 있다. 이는 우리의 의식과 신체 속에 스스로 인식하기 어렵지만 오래된 것들에 대한 DNA가 함축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옛 건축의 풍경과 디테일에서 느껴지는 다소 막연하지만 친근한 감성들은 이러한 DNA에 대한 기억의 흔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일상적이고 오래된 것들을 통해 발견할 수 있는 가치는 합리성이란 핑계로 결핍될 수밖에 없었던, 건강한 집짓기를 위한 실마리를 찾아보고자 함에 있지 않을까 한다.집에 대한 일상적이고 소소한 표상들은 #베르그송 의 표현을 빌리자면 인간적인 경험을 형성하는 ‘지각과 기억의 혼합물’(의식적 표상)로 설명할 수 있다. 즉 ‘지각과 기억이 경험을 형성’하고 있다는 의미이고, 여기서 # 기억 #Memory 은 단순한 심리적인 활동이 아니라 ‘지속’의 다른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다소 모호할 수 있는 기억이란 대상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기 위해, 부게로 Bouguereau의 《비너스의 탄생 The Birth of Venus》이란 그림을 일례로 들어보기로 한다. 사실적인 듯하면서도 사실적인 것과는 또 다른 느낌으로 각인되는 인상적인 그림이다. 부게로는 당대 그의 그림을 사기 위해서 개인은 엄두도 내지 못할 가격으로 거래되었던 소위 프리미엄 스타 화가였으며, 이후 소위 근대적 미술사조의 등장과 더불어 아카데믹한 기회주의자라는 오명과 더불어 가장 저평가되어야 했던 아이러니한 운명의 화가이다. 가로 218cm, 세로 300cm에 달하는 대작을 직접 눈으로 보고 있다고 상상해 보면, 그림에 대한 강렬한 인상은 충분히 우리의 머릿속에 각인되고 남을 수 있을 것이다.

부게로, 《비너스의 탄생 The Birth of Venus》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강렬한 인상은 과연 우리의 머릿속(뇌)에 저장되는 것일까 하는 것이다. 베르그송은 6여 년에 걸쳐 진행된 기억과 실어증에 관한 풍부한 자료와 검토, 연구를 토대로 ‘기억은 뇌에 저장되지 않는다’라는 결론을 도출했다. 물론 당시 의학계의 반응은 냉소적이었다. 더불어 생물학에서 제공하는 신경 체계에 대한 진화론적 설명으로부터 척수와 대뇌는 단지 복잡성에서의 정도 차이만을 지닐 뿐이며, 대뇌 또한 표상 기관이 아니라 운동기관이라는 통찰을 도출하기도 했다.

다시 말해 이 작품으로부터 받은 인상은 다름 아닌 우리의 #기억 이며, 이는 우리의 머릿속(뇌)에 저장되는 것이 아니라 (‘지각과 기억의 혼합물’로써) 우리의 #신체 밖에 존재하는 일종의 연속적인 운동, 지속의 소산이라는 것이다.쉽게 이해할 수 있는 설명은 아니지만, 베르그송의 설명은 그 어떤 논의보다 실증적이고 체계적인 설명으로 정평이 나 있다. 여기서 #지속 이란 곧 #시간 을 의미한다. 다만 우리가 알고 있는 시간에 대한 개념은 소위 과학의 시간, 공간화된 시간을 의미하지만, 반면 베르그송의 시간은 과학적 시간과 달리 불가분한 ‘질적 변화의 연속’으로서 – 설탕이 물에 녹기를 기다려야 설탕물을 얻을 수 있듯이 – 어떠한 운동이나 변화에 소요될 수밖에 없는 시간이 바로 실제 존재하는 시간이다.

더불어 베르그송의 사유에 있어 중요한 내용은 지속의 차원에서 물질과 정신의 차이가 있다면 서로 다른 리듬과 속도, 수준과 정도가 다를 뿐이며, 실재하는 것은 추상적인 공간이 아니라 구체적인 연장 Extension이며, 실재는 무언가로 가득 차 있는 연속적인 전체이다. 예를 들면 영화 <인터스텔라>에서 5차원 공간인 테서랙트에서 조종사인 아버지 쿠퍼가 물리학자인 딸 머피에게 모스 부호를 통해 딸과의 소통을 시도하는 장면은 이러한 베르그송의 언급과 유사한 사유체계의 표상이라 할 수 있다.

함축하자면 과거와 현재, 미래는 지속적인 흐름이란 관점에서 연속적이라는 것이다. 어쩜 우리가 과거의 것들을 단순히 추억이 아닌, 어떤 감각적인 대상으로 기억하고 있다는 것은 이러한 지속의 흐름과 유사한 맥락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발칙한 상상도 가능하다. 이러한 발칙한 상상과 더불어 현대 물리학의 성과를 소재로 하는 이 영화는 비교적 알기 쉽게 우리에게 시간과 공간의 개념에 관해 설명해 주고 있다.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3차원 공간은 현대 물리학의 범주 안에서는 단지 추상적인 공간일 뿐이며 실재하는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현대 건축은 철저하게 3차원 공간을 전제하고 있음을 고려하면, 3차원 공간이 실재가 아닌 추상적 공간이란 설정은 의미심장한 대목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러한 3차원적 공간에 대한 해석을 지금 우리가 건축설계 방법으로 채택하고 있는 인식론과 현격히 다른 인식론의 사례가 이미 오래전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소쇄원 목판본 및 소쇄원 배치도

위 그림의 오른쪽 표현은 현대의 전형적인 3차원 공간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보여주는 표현방식이다. 만약 건축가들에게 소쇄원을 도면으로 표현하라고 한다면 대부분 오른쪽과 유사한 방식으로 소쇄원의 배치도를 작성할 것이다. 하지만 1775년 4월에 제작된 #소쇄원 목판본에서는 소쇄원에 대한 전혀 다른 표현체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지금의 사유체계와는 전혀 다른 당시의 공간에 대한 관점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오른쪽 표현은 우리의 이성과 과학이 발견한 3차원 공간을 추상화하여 표현하는 기술적인 방법이다. 그래서 전문가가 아니면 이러한 설계도면이란 표상 체계를 구체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전문가조차 경험과 역량에 따라 이러한 표상 체계가 궁극적으로 표상하고 있는 대상을 파악하는데 작지 않은 차이가 발생한다.

실무에서 이러한 관점을 설명할 수 있는 대표적인 대상이 조경계획도이다. 사실 조경이란 개념을 앞서 언급한 3차원적 관점의 설계도면으로 표현한다는 것은 사실상 매우 어려운 대상이고 이러한 표현체계가 도입된 이후 가장 현실과 동떨어진 대상 중 하나가 조경 분야이다. 실재 현대 서양의 조경계획은 평면상의 기하학적 도상을 기반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경향이 농후하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을 우리는 아무런 비판 없이 그대로 도입하여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소쇄원이 가지는 전체적인 분위기와 공간적 가치를 이러한 현대화된 표현체계로 담는 것은 사실상 매우 어려운 부분이다.

주택 조경 역시 건물 배치도 몇 군데에 식재 표현을 의미하는 라이브러리 몇 개와 수종과 규격을 명기한다고 해서 우리가 추구하고자 하는 궁극적인 공간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우리가 인식해야 할 점은 이러한 설계도면이라는 것은 근대의 기술적인 표현 방법이지 실재 공간을 직접 의미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그래서 도면으로 표현하지 못한 내용을 시방서 혹은 기타 설계도서를 통해 보완하고 있다. 하지만 어떤 노력이 병행되더라도 설계도서는 실재 공간을 직접적으로 의미한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소쇄원 목판본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전혀 다른 방식의 표현체계가 있었음은 유의미한 대목이다. 우리는 오래된 마을이나 풍경을 마주하며 지각하는 것은 3차원적 표현 방법과 같은 해석에 의한 방법이 아니다. 더불어 어떤 작용인지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지만, 어떤 편안함과 안락한 분위기를 주고 있는 것을 부인하기 힘들다. 과거의 마을이나 도시는 지금의 가치 체계로 구현된 대상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표현체계가 다르다는 것은 실재 대상의 결과물 또한 다를 수밖에 없다.

대전 하기동 단독주택 ⓒ 김재경


이러한 오래된 것들에 대한 친숙함은 우리에게 내재한 기억의 흔적이라고 추측해볼 수 있으며, 사물과 현상, 관계성의 복원을 통해 결핍된 것들의 해소라는 관점에서 이해해 볼 수도 있다.과거의 표현체계라고 해서 현대의 표현체계보다 과학적이지 못하다거나 실용성이 없다고 단정하는 것은 다소 위험한 발상일 수 있다. 혹은 기술이 발전하지 못하여 과거에는 소쇄원을 이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었고, 기술이 발전하여 현대에는 저렇게 표현 가능하다고 해석하는 것 또한 위험한 발상일 것이다. 표현체계라는 형식론적 문제도 있을 수 있지만, 인식의 차이에 기인한 이유라고 해석함이 타당할 것이다.

일례로 19세기에 작성된 대동여지도의 표현체계는 현재 우리가 일반적인 표현체계로 채택하고 있는 지형도 보다 훨씬 사실에 가까운 표현체계이다. 추상적인 수치 체계와 달리 산과 산맥, 하천과 강의 관계를 전체적인 관점에서 체계적으로 표현한 대동여지도의 표현체계가 일상적인 관점에서 훨씬 유용하고 실효성 있는 표현체계임은 부정할 수 없다. 무엇보다 현격히 달라진 현대의 체계 속에서도 과거의 오래된 것들을 통해 지속해서 지각되는 어떤 감각과 기억이 실존한다는 점은 유의미한 지점이기도 하다.

어쩜 과거와 현재, 미래는 지속이란 차원에서 하나의 연속 선상에 있는 동일한 전체일 수도 있다. 과거가 미래일 수 있고, 미래가 과거일 수도 있다. 우리가 옛 건축을 뒤돌아보고 역사와 더불어 그 시대의 문화적 소산을 공부하는 이유는 단순히 역사적 교훈을 얻고자 함 이외에도,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는 하나의 연속 선상에 있는 동일한 전체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의미이다.영화 <인터스텔라>에서처럼 과거와 미래는 불과 거실벽 책꽂이를 사이에 두고 있을 수도 있는 오래된 미래이다.

양양 펜션 비온후풍경 ⓒ 김재경
속초 펜션 오롯이 ⓒ 김재경


그리고 이러한 논의의 의미 중 하나는 #합리성 의 그림자 속에서 어쩔 수 없이 물질과 정신으로 대립할 수밖에 없었던 이분법적인 모순을 현실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해 주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이러한 베르그송의 가치 또한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었고, 근래의 유행했던 (지금도 유행하고 있는) 소위 프랑스 철학의 첫 번째 희생자이기도 했다. 베르그송적인 사유에 대한 이해가 어렵다면,쉽게 집과 나의 삶에 대한 소소한 일상적 가치를 하나하나씩 정리해 보는 것만으로 충분할 것이다. 왜냐하면, 개인의 작은 단서(표상)일지라도, 그리고 그것이 개인의 지극히 사적인 기록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실마리로, 적절한 관점을 더하여 집짓기를 체계적으로 정리해 줄 수 있는 #건축가 란 존재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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