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르그송(Henri-Louis Bergson)의 사유를 중심으로 –

모 방송국에서 방송 중인 프로그램 중에 ‘투유 프로젝트-슈가맨을 찾아서’ 줄여서 ‘슈가맨’이란 프로그램이 있다. 한때 큰 인기를 끌며 풍미했지만, 자취를 감춘 가수, 일명 #슈가맨 을 찾는다는 포맷이다. 슈가맨은 멕시코 이민자 출신 로드리게스란 가수가 미국에선 무명가수였으나, 남아공에서 국민가수가 되었던 실화를 2012년 다큐멘터리로 영화화한 <서칭 포 슈가맨>이란 영화를 모티브로 하고 있다.

호불호가 다를 수 있겠지만 로드리게스의 삶을 다룬 영화만큼의 감동은 아닐지라도, 한때 인상적인 노래를 남기고 사라진 추억의 가수를 다시 만난다는 즐거움이 있는 프로그램이다. 그리고 성공과 실패의 희로애락 속에서 이제는 인기스타가 아닌 평범한 슈가맨의 이야기와 함께 그 시절 감정의 추억을 기억하는 이들이라면 함께 공감할 수도 있다. 물론 다소 뜬금없는 추억 팔이라는 비판도 있지만, 보는 이들에 따라 추억의 시간과 장소를 기억할 수도 있다.

말하고자 하는 바는 추억이 아닌 ‘기억(Memory)’이다.

집 짓는 이야기에 갑자기 #기억 이란 단어가 다소 생뚱맞아 보이기도 한다. 짙은 #합리성 의 그림자로 뒤덮인 요즘 같은 세상에서 #집짓기 는 지식과 정보, 효율성과 경제성, 형태와 디자인, 부동산과 상품 등과 관련된 생각들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런데 만약 이러한 것들이 정말 합리적이라면 이러한 것들만으로 우리는 얼마든지 행복한 집짓기가 가능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집짓기는 행복하지 않은 경우도 적지 않고, 무엇보다 시작부터 고민투성이며, 그 과정은 다소 무미건조하며 결과는 때때로 참담할 때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혹시 중요한 사실을 빠트리진 않았을까 하는 충분한 합리적 의문을 가져볼 수 있다.

그렇다면 집짓기에서 흔히 생각하는 합리성이란 ‘싸고 좋은 집을 짓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가? 이러한 생각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우리의 집짓기는 녹색 검색창과 더불어 길지 않은 시간 동안 각종 지식과 정보로 무장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경향이 짙다. 그리고 대부분 지식과 정보의 최종 종착지는 #평당건축비 와 #예쁜집 으로 귀결된다. 이 외에도 각종 박람회와 세미나 등 소위 정보공유의 장 또한 집짓기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과정이다. 집짓기의 A부터 Z까지 전문가도 쉽지 않게 생각하는 주제들을 어렵지 않게 통달할 수 있는 정보화 시대에 사는 덕분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합리성의 그림자 속에서 감출 수 없는 허전함을 완전히 제거하기는 힘들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이번에는 소위 #인문학 이란 바다에서 외로운 집짓기의 허전함을 달래보기도 한다. 하지만 결과는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집짓기에 대한 성경과 같은 그런 절대적인 믿음과 유사한 그 어떤 것을 기대했을지 모르지만, 남아 있는 것은 부유하는 표상들일 뿐이다. 물론 약간의 마음의 위안을 얻을 수 있다.

무엇보다 이러한 합리성은 난센스를 수반할 수밖에 없다.

일반적인 건축주의 관점에서 ‘비실용적인’, ‘추한’, ‘비싼’ 등과 같은 단어들은 집짓기에서 당연하고 빈번하게 등장하는 단어이다. 소위 합리성 중심의 가치 평가인데, 아마 #생활방식 과 #집 의 관계 속에서 집주인 중심의 가치가 불일치할 경우 불편함에 대한 우려일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건축주들의 생각들 속에는 서로의 가치가 상충하는 때도 빈번하며, 때에 따라서는 새롭고 편리한 가치보다 오래된 가치를 더 선호하기도 하는 역설적인 생각들도 빈번하다.

한마디로 어쩜 대중은 ‘정상적이고도 특이한 건축’을 요구하기 마련*** 인데, 일종의 ‘합리성의 오류’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 노베르그 슐츠(C.Norberg-Schulz) 저, 정영수 역, 『건축론』(Intention in Architecture), p.13~14, 세진사, 1999


집짓기를 준비하면서 우리가 지식과 정보로 무장하고자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사실 ‘싸고 좋은 집을 짓기’ 위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이를 합리성이라고 설명하고자 하지만, 사실 합리성과는 다소 동떨어진 지극히 주관적인 생각이라고 할 수 있다. 오히려 일종의 개인적인 ‘바람(Desire)’이라고 설명하는 것이 유용할 듯하다. 개인적으로 나름 10년 넘게 집들을 설계하고 시공하면서 얻은 경험 중 하나는 ‘싸고 좋은 집은 없다’라는 것이다. 그리고 현대 사회의 각종 네트워크상에 존재하는 집에 대한 이미지들은 (같은 집이지만) 현실의 존재하는 집과 같지 않은 집들이 대부분이라는 점이다. 우리가 애당초 설정하고자 했던 합리성은 결과적으로 오류를 내포할 수밖에 없는 ‘자의적인 바람(Desire)’ 것들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여기까지의 요점은 대부분의 집짓기에서 우리는 – #건축주 #건축가 등 모두 – 소위 합리성이란 명분에 근거해서 어떤 행위와 가치를 추구하지만, 이러한 합리성이 집짓기의 모든 어려움을 해결해 줄수 있는 만능의 잣대가 아니라는 점이다. 합리성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또 다른 가치들이 우리의 집짓기에 필요한 법이다.

한 마디로 ‘집에 대한 내 생각과 가치의 발견이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생각과 가치의 발견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집짓기의 이런저런 표상들에 – 그것이 객관적인 지식과 정보라고 할지라도 (그리고 알고 보면 그것의 객관성은 어차피 객관적인지 아닌지도 판단하기 어려우며, 다분히 주관적인 문제들이 대부분이다) – 대해 ‘인식의 변화’를 수반하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집에 대한 내 생각과 가치의 발견은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다소 어렵게 느껴질 수 있는 질문이지만, 어렵지 않게 생각해 볼 수 있는 상상과 구체적인 경험이면 충분할 수도 있다. 예를 들면 비가 내리는 날에도 비를 맞지 않는 테라스가 있었으면 좋을 것 같다. 라는 생각이다. 어릴 적 부모님과 종종 방문했던 외갓집 시골 풍경도 좋고, 꼭 집이 아니라도 인상적이었던 공간이나 장소에 대한 간략한 묘사도 좋다. 선호하는 가구 스타일과 구체적인 사용 패턴에 대한 생각도 좋고, 조금 생소하지만, 반려묘를 위해 문에 작은 구멍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좋다. 겨울철 화장실 문을 열면 느껴지는 한랭한 느낌이 싫다는 것도 좋고, 실내 화분에 일일이 물주고 관리하기 힘들므로 아예 화단을 만들어 보면 어떨까 하는 상상도 좋다. 그리고 이러한 다소 감성적인 접근 이외에도, 지금은 아이들이 어려서 상관없지만, 아이들의 성장과 더불어 필요에 따라 적절한 기능을 고려할 수 있는 가변적인 공간에 대한 요구도 한 번쯤 해 봄 직한 생각이다. 더불어 이후 유지관리 등의 비용을 고려할 수 있는 집의 생애주기와 관련된 비용 계획 등과 같이 논리적인 생각들도 집에 대한 가치를 발견하는 중요한 생각 중 하나일 것이다. 쉽게 말해 집과 관련된 소소하지만, 구체적인 생각들을 포함하여 자유롭게 상상해 볼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들은 자연스럽게 내가 생각하는 #집 에 대한 #표상 들로 정리해 볼 수도 있다.

#베르그송 은 이러한 표상은 그 자체로 실재의 단순한 반영이라기보다는 인간적인 경험을 형성하는 ‘지각과 기억의 혼합물(=의식적 표상)***로써 설명하고 있다. 즉 #지각 과 #기억 이 #경험 을 형성’하고 있다는 의미이고,기억(Memory)’은 단순한 심리적인 활동이 아니라 #지속 의 다른 표현이라 할 수 있다.*** 기억은 일종의 ‘연속적인 운동’이라는 의미이며, 이러한 기억이야말로 물질(객체)적인 것과 구분되는 정신(주체)적인 것들의 가장 큰 차이점이라고 설명한다.

*** 앙리 루이 베르그송(Henri-Louis Bergson) 저, 김재희 역, 『물질과 기억』:반복과 차이의 운동(Matière et mémoire), p81~82, p78, 살림, 2012

즉, ‘집에 대한 내 생각과 가치의 발견’을 위한 ‘다양한 표상’은 기억이란 지속성의 인식을 통해 ‘나’와 ‘나의 삶’ 자체를 생각해 볼 수 있는 일종의 매개체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나’와 ‘나의 삶’ 자체에 대한 사유들은 집짓기에서 합리성의 오류를 보완할 수 있는 유용한 방법이기도 하다.

한 번 더 다소 생뚱맞은 예를 들어 본다. 부게로(Bouguereau)의 ‘비너스의 탄생(The Birth of Venus), 1879’이란 그림이 있다. 스쳐 지나갔을지라도 한 번쯤은 본 적인 있는 작품으로, 사실적인 듯하면서도 사실적인 것과는 또 다른 느낌으로 각인되는 인상적인 그림이다.

부게로는 당대 그의 그림을 사기 위해서 개인은 엄두도 내지 못할 가격으로 거래되었던 소위 프리미엄 스타 화가였으며, 이후 소위 근대적 미술사조의 등장과 더불어 아카데믹한 기회주의자라는 오명과 더불어 가장 저평가되어야 했던 아이러니한 운명의 화가이다. 가로 218cm, 세로 300cm에 달하는 대작을 직접 눈으로 보고 있다고 상상해 보면, 첨부된 이미지 이상의 강렬한 인상은 충분히 우리의 머릿속에 각인되고 남을 수 있음이 자명해 보인다.

부게로 비너스 탄생 이미지 검색결과"

부게로(Bouguereau)의 ‘비너스의 탄생(The Birth of Venus), 1879
사진출처 : https://en.wikipedia.org/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강렬한 인상은 과연 우리의 머릿속(뇌)에 저장되는 것일까 하는 것이다. 베르그송은 6여 년에 걸쳐 진행된 기억과 실어증에 관한 풍부한 자료와 검토, 연구를 토대로 ‘기억은 뇌에 저장되지 않는다’라는 결론을 도출했다.*** 물론 당시 의학계의 반응은 냉소적이었다. 더불어 생물학에서 제공하는 신경체계에 대한 진화론적 설명으로부터 척수와 대뇌는 단지 복잡성에서의 정도 차이만을 지닐 뿐이며, 대뇌 또한 표상 기관이 아니라 운동기관이라는 통찰을 도출하기도 했다.***

*** 앙리 루이 베르그송(Henri-Louis Bergson) 저, 김재희 역, 『물질과 기억』:반복과 차이의 운동(Matière et mémoire), p50, 살림, 2012

*** 앙리 루이 베르그송(Henri-Louis Bergson) 저, 김재희 역, 『물질과 기억』:반복과 차이의 운동(Matière et mémoire), p60, 살림, 2012


즉, 우리가 부게로(Bouguereau)의 ‘비너스의 탄생(The Birth of Venus)을 베르그송적으로 해석해 보자면, 이 작품으로부터 받은 강렬한 인상은 다름 아닌 우리의 #기억 이며, 이는 우리의 머릿속(뇌)에 저장되는 것이 아니라, (‘지각과 기억의 혼합물(=의식적 표상)로써) 우리의 신체 밖(on)에 존재하는 일종의 연속적인 운동, 지속의 소산이라는 것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설명은 아니지만, 베르그송의 설명은 그 어떤 논의보다 실증적이고 체계적인 설명으로 정평이 나 있다.

그리고 여기서 지속이란 곧 #시간 을 의미하는데, 우리가 알고 있는 시간에 대한 개념은 소위 과학의 시간, 공간화된 시간을 의미한다. 반면 베르그송의 시간은 과학적 시간과 달리 불가분한 ‘질적 변화의 연속’으로서 – #설탕 이 물에 녹기를 기다려야 #설탕물 을 얻을 수 있듯이 – 어떠한 운동이나 변화에 소요될 수밖에 없는 시간이 바로 실제 존재하는 시간이다.***

*** 앙리 루이 베르그송(Henri-Louis Bergson) 저, 김재희 역, 『물질과 기억』:반복과 차이의 운동(Matière et mémoire), p31, 살림, 2012


조금 더 설명을 첨부하자면, 과학적 지성은 실재의 시간성을 제거한 채, 마치 실재가 고정되어 있고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공간 속에 펼쳐놓고 다룬다고 설명하고 있으며, 그럼으로써 예측 가능한 어떤 결과물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설명은 과학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이 놓쳐버린 ‘실재 지속’에 대한 ‘참된 인식’은 과학이 아닌 #형이상학 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 앙리 루이 베르그송(Henri-Louis Bergson) 저, 김재희 역, 『물질과 기억』:반복과 차이의 운동(Matière et mémoire), p32, 살림, 2012


앞서 언급한 합리성의 그림자와 오류에 대한 인식과 그에 대한 보완책의 관점이란 측면에서 한 번쯤 검토 가능한 방법이다. 그리고 이러한 베르그송적인 사유의 이해가 어렵다면, 그냥 쉽게 집과 나의 삶에 대한 소소한 일상적 가치를 하나하나씩 정리해 보는 것만으로 충분할 것이다. 왜냐하면, 개인의 작은 단서(표상)일지라도, 그리고 그것이 개인의 지극히 사적인 기록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단서로 적절한 합리적 관점으로 집짓기를 체계적으로 정리해 줄 수 있는 건축가란 존재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소 사변적이고 어렵게 느껴지는 베르그송의 이러한 논의의 중요한 가치는 합리성의 그림자 속에서 어쩔 수 없이 물질(객체)과 정신(주체)으로 대립할 수밖에 없었던 이분법적인 모순을 현실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해 주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이러한 베르그송의 가치 또한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었고, 근래의 유행했던 (지금도 유행하고 있는) 소위 프랑스 철학의 첫 번째 희생자이기도 했다. 부게로와 베르그송은 당대 각 분야의 최고의 스타였지만, 이후 최악의 평가 절하를 당하고 마는 아이러니한 공통점이 있기도 하다.

건축적인 사례 하나를 추가해 보도록 한다.

Studio Guilherme Torres, Casa BT
사진출처 : https://www.archdaily.com


초고속 인터넷 선진국인 우리의 정보화 수준은 건축 관련 종사자가 아닌 일반인들도 핀터레스트 등 다양한 웹 서비스를 통해 갖가지 이미지를 취득하는 데 전혀 어려움이 없다. 그 옛날 낯설게 느껴지는 이미지 몇 장으로 미완의 드로잉(Drawing)을 보완하면서 건축주의 착시 효과를 의도한 다소 어설픈 프리젠테이션 방식은 이제 웬만한 건축주들의 눈높이에 다소 미흡함이 느껴질 정도로 우리는 정보와 이미지 강국으로 발전되어 있다. 첨부하는 이미지 또한 핀터레스트 등에서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는 눈길을 사로잡는 이미지 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오프라인 매체뿐만 아니라 다양한 인터넷상의 커뮤니티, 인기 블로그들 등의 아마추어지만 나름대로 사례 분석은 어지간한 비평가들을 대신하고 있을 정도이다. 단순한 메스와 자연적 요소의 적절한 관계성과 지역적 아이덴티티가 조화롭게 오버랩 된 작품이라는 둥, 뜨거운 햇살과 실내 공간이 관계 맺는 방식인 스크린(Screen)과 팜파스 그라스의 스타일리쉬한 매칭이 남미 지방 특유의 지역성과 어우러진 고유한 디자인 특성이 돋보이는 작품이라는 정도의 평가는 건축과 무관한 어지간한 아마추어들도 충분히 평가할 수 있는 립서비스 이상의 수준이기도 하다.

하지만 어렵게 베르그송의 설명을 늘어놓은 이유 중 하나는 #정보 를 가장한 #집 에 대한 이러한 #이미지 적인 #지식 이외에, 좀 더 차분하고 사유가 있는 #집짓기 가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점을 기억했으면 하는 바람에서이다.

첨부된 이미지는 집에 대한 나의 표상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표상일 것이다. 비록 나의 표상이 아닐지라도 인터넷 강국의 장점 중 하나는 타인의 표상도 나의 표상처럼 생각해 볼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그것도 한두 개가 아닌 원하면, 원하는 만큼도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집을 짓고자 준비하는 사람이라면 부게로의 그림 못지않게 이러한 이미지 또한 강렬한 인상으로 기억되는 이미지일 것이다.

단순한 형태와 단출한 식재 계획으로 평가 절하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개인적인 인지 범위에서 이러한 건축물은 적지 않은 시간 동안 적지 않은 건축가의 에너지 활동이 수반된 결과이며, 이후 시공 과정 또한 절대 만만하지 않은 과정이 있었음을 인지하게 된다. 하지만 정보와 이미지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에겐 전혀 다른 시각으로 읽히기도 한다.

베르그송의 가치가 필요한 이유는 이러한 지점에서 다소 차분하게 대상(집)에 대한 우리의 관계 설정 방법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해 준다는 점이다. ‘기억(Memory)’의 묘미를 (개인적 해석) 음악적 버전으로 표현하자면 ‘minor♯’(마이너 샵) 효과인데, 화려한 이미지보다는 #모노톤 (단조)으로 숙고하되, 그렇다고 해서 우울하거나 지루할 필요는 없는 (반음 올림) 묘한 #즐거움 이다.


오히려 #집 #주거 #건축 혹은 #건축디자인 이란 대상을 비트루비우스(Vitruvius)와 그의 추종자들이 찾고자 했던 어떤 규범이나 원리 등으로 규정하려는 시도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 한다. 더불어 기능주의나 환경결정론 같은 절대적인 가치관으로부터 또한 자유로울 수 있어야 할 것이며, 근대 #예술 과 #문화 의 핵심 가치 중 하나인 #자의성 과 같은 태도로부터 좀 더 겸허한 인식이 필요하다. 당연히 시뮬라크르(simulacra)적이거나 #상품 만능주의에 입각한 저렴한 관점 또한 수정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아뜰리에 비온후풍경 / OGL Architects, 양양 부띠크빌라
사진출처 : https://genius-partners.com/


베르그송의 설명을 늘어놓는 또 하나의 이유는 앞서 언급한 지양해야 할 ‘바람(Desire)’에 대한 해석적 방법론을 암시해 주고 있다는 점이다. 즉 ‘기억(Memory)’의 또 다른 묘미는 (개인적 해석) 일종의 #작용 #끌림 #attraction 으로 해석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한다. 실제 베르그송의 『물질과 기억』에서 물질(대상)에 대해 ‘지각과 기억이란 혼합물’이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를 체계적인 논증으로 설명하는 내용이다. 우리의 ‘지각과 기억’은 실재하지 않는 추상적, 개념적 담론과 규범들에 비하면 오히려 존재함이 명확한 대상임을 충분히 밝히고 있다. 그 과정이 다소 어렵지만 이러한 ‘지각과 기억의 혼합물’이란 의식적 표상체계는 물질(대상)에 대한 ‘끌림(attraction)’이란 작용 과정으로 치환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어찌 되었든 이러한 사유체계는 #집 과 #건축 이란 대상을 접근함에서, 건축주, 건축가 모두에게 (다소 낯선 관점이지만) 충분히 유용한 관점이다. 건축주, 건축가 모두 적절한 합리성을 찾고자 하지만, 어쩔 수 없는 합리성의 오류에서 벗어날 수 없다. 더군다나 건축주, 건축가 모두 합리성이란 명분으로 물질(대상)에 대해 오히려 훨씬 왜곡된 접근방식을 취하고 있는 점을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정보와 지식으로 무장한 우리의 합리성은 ‘평당 건축비’와 ‘예쁜 집’, ‘싸고 좋은 집 짓기’ 등의 키워드 이외에는 그 어떤 유용한 가치를 발휘해 주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그조차 공학적 객관성을 담보하지 못한 이미지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오히려 컬러플한 이미지보다 #모노톤 #Monotone 으로 톤 다운하되 적당히 즐거운 마음으로 사물(대상)에 대한 ‘지속적인 끌림’에 대해, 과연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지를 생각해 보는 것이 훨씬 유익할 수 있다. 과학이 놓쳐버린 실재 지속에 대한 참된 인식을 과학이 아닌 형이상학을 통해서 가능하다는 베르그송의 설명은 다소 어렵지만, 이러한 생각을 집과 건축이란 대상을 대입해서 생각해 보면 오히려 자연스러운 설명이 가능하지 않을까 한다. 왜냐하면, 집과 건축이야말로 과학과 형이상학이 오롯이 우리의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언제나 공존하고 있는 실체 하는 구체적인 대상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듯 ‘기억(Memory)’의 묘미는 사물(대상)에 대한 우리의 태도와 가치, 접근방법, 유용성 등에 대해 다양한 가치를 제공해 주고 있다는 점이다. #슈가맨 을 소환하는 것보다 우리의 #기억 을 소환하는 것이 더 시급한 과제일지도 모른다.

아뜰리에 비온후풍경 / OGL Architec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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