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당한 햇살이 비치는 어느 날, 처마 아래 목재 데크(Deck)로 마감된 테라스에서, 마주하고 있는 정원에 진달래가 있다면 두견화와 더불어 커피 한잔 마실 수 있는 장면(Scene #1)은 #집 을 짓고자 사람들에게 행복한 상상 속 장면 중 하나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러한 장면을 상상하면서 행복함을 느끼게 되는 것일까?

건축적인 해부학의 잣대를 적용해 본다면, – #건축 은 레오나드로 다빈치(Leonardo da Vinci)가 그러했던 것처럼 의외로 해부학에 관심이 많다 – 이 장면(Scene #1)은 #공간 #장소 #기호 #시간으로 구성된 장면으로 파악해 볼 수 있다. ‘처마 아래 테라스’라는 표현은 일종의 공간적 표현이며, ‘테라스와 마주하고 있는 정원’이란 표현은 장소적 표현일 것이다. 그리고 ‘커피 한잔’이란 표현은 다분히 기호적인 표현이며, 구체적인 시간을 명시하고 있지 않지만 ‘진달래(두견화)와 적당히 햇살이 비치는 어느 날’이란 표현은 4월이란 시간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장면은 장면(Scene #1), 장면(Scene #2), 장면(Scene #3)…. 등 다양한 장면으로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이며, 실재 건축을 구성하는 개별적인 요소들로 상정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장면들의 연속적인 관계가 다름 아닌 집이고 건축인 것이다. 물론 이러한 장면들의 연속적인 관계만으로 건축의 모든 문제를 규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한편으론 유용한 접근방법임도 사실이다.

재미있는 점은 건축을 이러한 관점으로 바라보는 것이, 그렇게 어색하지 않은 분위기로 인식된 지는 사실 얼마 되지 않는다. 만약 르네상스나 바로크 시대에 건축을 이러한 공간, 장소, 기호, 시간 등으로 구성된 장면의 연속적인 관계라고 언급했다면, 무시당하기 딱 좋은 말이거나 대화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는 아마 20세기 초반까지도 그러했을 것이다. 그만큼 과거의 (얼마 전까지) 건축과 현대의 건축은 그 대상과 관심의 영역이 현격히 달랐다는 의미이다. 지금은 공간을 건축에서 중요한 대상이라고 언급한다고 해서 크게 어색함이 없지만, 공간이 건축의 중요한 대상으로 자리 잡은 것은 사실 역사적으로 얼마 되지 않은 사건이다.

건축에서 공간이란 대상은 소위 #모더니즘 건축이 이전의 전통적인 건축으로부터 새로운 가치를 모색하면서 등장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대표적으로 지그프리드 기디온(Sigfried Giedion)이 『Space, Time and Architecture』(공간, 시간, 건축)에서 언급한 공간 개념이 가장 영향력 있는 근대적 공간 개념일 것이다. 그리고 모더니즘 건축 비판의 연장선에서 기디온의 공간 개념과는 결이 다른 – 『Architecture as Space』(공간으로서의 건축) 등에서 – 브로노 제비(Bruno Zevi)가 언급하고 있는 공간 개념도 있다.

또 한 가지 사실은 건축에서 이러한 공간에 대한 논의는 다분히 19세 말 #미술사 와 #미술 공예 운동, 그리고 소위 #현대추상미술 등에 큰 빚을 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인지 기디온, 브로노제비 등이 언급한 공간 개념은 건축사에 대한 탁월한 통찰력을 근간으로 하고 있음에 비해, 건축적 담론에서 그렇게 오랫동안 지속적이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오래지 않아 노베르그 슐츠(C. Norberg Schulz)의 존재론적 #현상학 을 기반으로 한 장소에 대한 가치, 기호학의 대두에 따른 기호학적 형태주의. 후기구조주의 및 들뢰즈 등에 기인한 시간에 대한 개념 등으로 현대 건축은 다양한 경향들을 표상하고 있다.

어찌 되었건 중요한 점 중의 하나는 우리가 현재 인식하고 있는 건축의 대상들 대부분 그렇게 오래되지 않은 사유체계들에 기인하고 있다는 점이다. 공간, 장소, 기호, 시간 등의 개념이 건축에서 중심 테제로 본격적으로 다루어진 것은 불과 20세기 중반부터이다. 이러한 상황은 #현대미술 또한 유사한데, 전통적인 회화로부터 전혀 새로운 가치의 현대미술로 전이되는 과정 또한 불과 50년이 채 안 되는 시간 동안의 사건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현대사회의 발전 및 변화의 양상이 그만큼 급진적이며 속도감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이러한 #속도감 때문인지, 건축에서 공간, 장소, 기호, 시간이란 개념은 깊이 있는 사유와 해석적 대상이라기보다 문화라는 심급 속에서 소비되기에 급급한 대상들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표면적으로 매우 당연하고 어렵지 않은 대상으로 간주할 수도 있지만, 사실 어느 것 하나 만만한 개념들이 아니다. 그리고 이러한 대상들이 더욱 혼란스럽게 여겨지는 문제 중 하나는 같은 단어지만 그 개념을 사용하는 기저의 궁극적인 해석과 취지가 전혀 다른 가치관들 임에도, 구체적인 구분 없이 자의적 편의에 따라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일일이 의미를 구분하고 하나하나 사유의 근원을 찾아 각주를 달고자 하는 자체가 무의미해 보이기까지 한다.

또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은 앞서 장면(Scene #1)을 해석하면서 설정한 공간, 장소, 기호, 시간이라는 대상은 한마디로 #비물질적인 속성을 공통분모로 가지고 있는 대상이라는 점이다. 물론 공간, 장소, 기호, 시간 등을 오롯이 비물질적인 대상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논쟁의 여지가 충분하다. 그리고 만약 이러한 대상들이 건축에서 비물질적인 대상이라고 규정하고자 한다면 아마 방대한 논의와 논증이 필요한 대상일 것이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이러한 대상들은 결코 만만한 대상들이 아니다. 더욱이 어떻게 공간과 장소라는 대상이 비물질적인 대상으로 해석할 수 있는지, 특히 장소라는 대상이 비물질적인 대상일 수가 있기는 있는 건지 등 격렬한 논쟁을 충분히 예측할 수 있다.

환기가 필요한 대목이다.

이 지점에서 대상을 바라보는 관점 혹은 사유 방법에 대한 언급이 필요할 듯하다. 아무래도 이러한 관점의 문제와 #사유 방법에 대한 문제는 건축 자체가 아닌 소위 철학의 영역에서 참조함이 합리적일 것이다. 참조를 통해 우리가 대상을 바라보는 시선은 몇 가지 관점으로 분류할 수 있는데, 관념론적, 실증론적, 유물론적, 현상학적, 구조주의적(기호학적) 관점들이 있을 수 있다. (철학을 논하고자 함이 아니므로 각각의 상세한 설명은 생략하도록 한다.)

우리가 건축에서 공간, 장소, 기호, 시간의 대상들을 다룸에 있어 혼란스럽고 해석이 쉽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언급한 바와 같이 저마다의 가치 체계들이 얽혀 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우리는 저마다 필요에 따라 각자의 필요한 부분만 오려내어 참조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일 것이다. 중요한 점은 이러한 건축의 내부 문제를 떠나 대중과 소통하는 현실적인 문제에서 대중은 이미 (건축 내부의 문제와 무관하게) 현대의 #문화 라는 범주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다는 점이다. 학문을 위한 학문, 건축을 위한 건축은 전혀 학문답지도, 건축답지도 못한 모습일 것이다.

비록 한때 미술사에 기대어 자신의 모습을 변화했고, 지금은 철학의 사유를 참조하지 않으면 자신의 모습조차 해석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건축이 의존적이고 나약하거나, 고유성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할 이유가 전혀 없다. 과거의 #예술 은 종언을 고한지 이미 오래고, 회화는 더는 #회화 자체로 존립할 수 없는 화가가 아닌 예술가의 모습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운명이며, 예술은 자신을 학대하며 더욱 고립된 영역으로 방황하려 하고 있다. 또한, 철학은 범접할 수 없는 과학 기술의 발달로 사유의 중심에서 밀려난 지 오래이며, 소위 인문학을 빙자한 리버럴 아츠(liberal arts)와 비교당해야 하는 수모를 겪고 있으며, 아직 과학이 발견하지 못한 얼마 남지 않는 밤바다에서 고작 해안선 일부를 비추고 있을 뿐인 기계적인 등대로 전락할지 모르는 그런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하물며 건축 또한 그런 시대를 살아가고 있음은 전혀 어색한 일이 아닐 것이다.

모더니즘 건축이 회화에 빚을 지고 있는 만큼, 현대 건축이 철학적 사유에 기대고자 하는 것은 전혀 부끄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오히려 오랜 여행을 끝내고 어머니의 품과 같은 사유와 예술, 기술이 공존했던 고대의 가치 체계를 기웃거리고 있는 모습은 역설적이지만 바람직한 모습일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건축이 참조하고자 하는 첫 번째 대상은 『안티 오이디푸스』(L’Anti-Oedipe)의 저자인 ‘질 들뢰즈(Gilles Deleuze)’의 사유이다.

많은 논쟁이 자명한 대상임에도 불구하고 공간, 장소, 기호, 시간이란 대상을 비물질적인 대상으로 규정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들뢰즈의 사유’와 ‘시뮬라크르(Simulacre)’라는 개념에 기대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들뢰즈의 저작에서 ‘시뮬라크르’라는 단어는 그 언급의 빈도수가 그렇게 빈번하지 않지만, #들뢰즈 의 사유는 후기구조주의의 맥락과 함께 살펴봄이 타당할 것이라는 이유와 단어의 직접적인 언급 횟수와 무관하게 충분히 #시뮬라크르 라는 개념을 내포하고 있으며, 이러한 개념을 함께 고려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라는 전제가 있다.

(후기)구조주의라는 사유체계는 이전의 다른 사유체계 모두와 전면적으로 대립하면서 내부의 다양한 심급들을 일종의 네트워크적 방식으로 상호 성과물들을 긴밀하게 링크시키고 보완하고 있다는 점에서 (어떤 면에서 알파고의 딥 러닝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매우 견고하고 단단한 사유의 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연장에서 건축에서 가장 혼란스러운 개념 중 하나인 공간이란 대상의 성격을 재조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건축가 가 건축(물)이란 대상을 표현하고자 함에 있어 사용되는 전통적인 방법 중 하나가 #원근법 과 더불어 #평면 (平面, Plan), #입면 (立面, Elevation), #단면 (斷面, Section)이라는 표현체계일 것이다. 이러한 방식은 입체적인 건축(물)을 합리적으로 표현(재현)하기 위해 X, Y, Z축이란 가상의 #공간 체계 속에서 개별적인 방법으로 입체를 표현하기 위해 고안된 방식이다. 그리고 영문 표기에서 알 수 있듯이 이들은 각각의 소기의 목적을 위해 창안된 일종의 드로잉(Drawing) 방법이기도 하다. 하지만 단편적인 시-지각 중심적인 관점, 실재와 무관하게 사람의 인식 틀 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소위 추상적 대상에 대한 표현체계라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표현체계는 실증적이면서 아이러니하지만 동시에 관념적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방식은 입체적인 대상(3D)을 평면적인 대상(2D)으로 표현하기 위해 고안된 분명 기술적이고 객관적인 도구임은 분명하지만, 원근법을 포함한 이러한 재현 체계는 사물의 객관적 재현 상태가 아니라, 인간의 눈에 비친 주관적 영상에 불과하다.***

*** 진중권 저,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모더니즘편, p287, ㈜휴머니스트 출판그룹, 2011

라는 의미도 함께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발 더 나아가 피카소의 절친이자 입체파의 대표적 화가인 브라크는 과학적 원근법은 단지 눈을 속이는 환영 주의이다.***

*** 진중권 저,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모더니즘편, p64, ㈜휴머니스트 출판그룹, 2011

라는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재미있는 점은 20세기 초반 입체파 시절 이미 이러한 관점이 제기되었지만, 건축 실무에서는 지금도 여전히 이러한 표현체계가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통용되고 있는 보편적인 방식이라는 점이다. 심지어 이러한 표현체계를 기반으로 생산되는 소위 건축 ‘도면’ 이야말로 건축가의 가장 중요한 임무이자 역할로 한정 짓는 경우도 적지 않으며, 때에 따라 일종의 ‘숭고미’의 같은 경건함의 대상으로 설명하는 경우를 아직도 목격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의 공간 개념은 앞서 장면(Scene #1)을 구성하는 대상으로 언급한 공간 개념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공간 개념이다. 쉽게 말해 우리의 의식 속에서 한정적이고 추상적이며, 개념적으로만 존재하는 공간 개념이다. 그래서 건축의 표상은 다분히 형식주의적인 경향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으며, 심지어 부분적이긴 하지만 회화적인 방법론과 유사성을 나타내기도 하며, 간혹 건축가 자신도 화가와 혼동하는 경향을 나타내기도 한다. 현대미술이 입체파 시절 이미 이러한 관점에서 탈피하여 다양한 가치 체계로 전이했음을 참작하면 어쩜 매우 전근대적인 사고 체계이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공간은 물론이고 장소, 기호, 시간이란 대상도 당연히 존재할 수 없는 대상이다.

재조명되어야 할 또 하나의 개념으로 장소라는 대상이 있다. 현대 건축에서 장소 개념의 근간은 『Genius Loci』(장소의 혼) 등을 저작한 노베르그 슐츠의 맥락과 맞닿아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슐츠의 논의는 소위 현상학적 사유체계의 연장선에서 건축을 바라보고자 한 것이 분명해 보이며, 현상학 자체가 추상적이고 정신적인 구조와는 상반되는 개념으로 ‘사물로 회귀하는 어떤 것(return to thing)’***

*** 노베르그 슐츠(C. Norberg Schulz) 저, 민경호 외 역, 『Genius Loci』(장소의 혼), p11, 태림문화사, 1996

이라는 관점에서 장소라는 개념은 의미 있는 건축적 대상이지 않았을까 한다.

슐츠는 ‘장소(Place)’를 시각에 나타난 장소의 구체적인 성질을 잃어버리지 않은 채로, 공간적 관계 같은 어떠한 성격조차도 줄일 수 없는 질적이고 총체적인 현상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더불어 장소란 질적으로 복합적인 성질의 전체이므로 분석적이고 과학적인 방법에 의해 묘사될 수 없음을 부연하고 있다.***

*** 노베르그 슐츠(C. Norberg Schulz) 저, 민경호 외 역, 『Genius Loci』(장소의 혼), p11, 태림문화사, 1996

하지만 일련의 슐츠의 논의에서 신체와 세계 사이에서 사물을 지각하는 주체의 문제에 대해서는 다소 소홀한 부분이 있어 보인다. 메를리-퐁티(Merleau-Ponty)의 『Phénoménologie de la perception』(지각의 현상학)과 들뢰즈의 『Logique du sens』(의미의 논리)는 분명 다른 내용이지만 묘하게 겹쳐 보이는 지점도 있다. 중요한 차이점은 메를리-퐁티는 어떤 의미 작용이 ‘사물에 대한 지각’을 통해 발생한다고 하지만, 들뢰즈는 의미 작용이 물체에는 투과 불가능하며, ‘비물질적인 표면에서 발생’하는 환각, 즉 ‘시뮬라크르(Simulacre)’로부터 발생한다고 설명한다. 다시 말해 퐁티에서 ‘사물에 대한 지각’은 일종의 주체성의 존재를 설정하고 있지만, 들뢰즈에게는 이와 같은 주체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 이정우 저, 시뮬라크르의 시대, p.110~111, 거름, 2002

이 지점에서 솔직히 난해함을 토로하지 않을 수 없다. 상식적이고 일반적인 가치 체계로는 쉽게 납득할 수 없는 결론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나마 현상학적 사유체계와 구조주의적 사유체계는 어렵지만 어렴풋하게나마 그 얼개를 인지할 수 있다. 하지만 들뢰즈의 난해함은 넘을 수 없는 벽이나 건널 수 없는 강처럼 형용하기 어려운 난해한 대상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논의 방식 자체가 온갖 역설로 가득하며, 전개 또한 논증이 아닌 해체에 가까운 사유 방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들뢰즈를 이해하는 데에는 적지 않은 들뢰즈 해설서와 또 다른 해설서의 도움이 필수적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들뢰즈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베르그송의 논의 또한 필수적인 선결 조건이다.

베르그송의 논의 중에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기억은 뇌에 저장되지 않는다’는 지점이며,***

*** 앙리 루이 베르그송(Henri-Louis Bergson) 저, 김재희 역, 『물질과 기억』:반복과 차이의 운동(Matière et mémoire), p50, 살림, 2012

표상은 물질 표면에 작용하는 지각과 운동적인 속성을 갖는 기억의 혼합물 개념으로 설명하는 대목이다.***

*** 앙리 루이 베르그송(Henri-Louis Bergson) 저, 김재희 역, 『물질과 기억』:반복과 차이의 운동(Matière et mémoire), p82, 살림, 2012

쉽게 말해 베르그송과 들뢰즈에게 있어 의미 작용의 주체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러한 개념은 현상학적 사유체계 자체를 정면으로 반박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슐츠의 장소는 (분석적이고 과학적인 방법에 의해 묘사될 수 없는) 추상적이고 정신적인 것과는 상반되는 개념으로 ‘사물로 회귀하는 어떤 것(return to thing)’이라고 설명하고 있지만, 베르그송과 들뢰즈에 있어서 이러한 판단(지각) 주체 자체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유의미한 대목을 잠깐 짚고 넘어가자면 일련의 논의 과정에서 엄밀하게 건축에서 공간이란 대상을 제외하면, 장소, 기호, 시간이란 대상은 건축에서 직접적인 작(적)용 사례를 사실상 찾아보기 쉽지 않다는 점이다. 아마도 #페터 춤토르 (Peter Zumthor)의 일련의 작품 이외에는 존재론적 현상학이란 관점에서 건축적 대상을 논할만한 대상을 쉽게 찾아볼 수 없지 않을까 한다. 물론 현대 건축에서 #물질성 자체에 관심을 두고, 소위 텍토닉(tectonic)한 일련의 논의를 포함한 다양한 관점들을 발견할 수 있지만, 이를 지속성을 확보한 그룹핑으로 설정하기에는 다소 한계가 있어 보인다. 더불어 20세기 이전 뵈타허, 젬퍼 등의 사례를 통해 텍토닉(tectonic)적 관점을 견지하는 것은 여기서 논의하고 있는 물질성과는 다소 결이 다른 관점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Peter Zumthor, klaus chapel
사진출처 : https://afasiaarchzine.com/


또한, 장소라는 대상 이외에 건축적 범주에서 기호학적 혹은 시간성을 표현한 건축적 대상은 더더욱 찾아보기 힘들지 않을까 한다. 물론 피터 아이젠만(Peter D. Eisenman) 및 이와 유사맥락이 있는 일련의 작품들을 기호라는 대상의 건축물서 생각할 수 있지 않냐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개인적인 관점에서 미국을 근간으로 하는 소위 포스트 모더니즘과 그 연장선에 있는 건축적 소산은 다소 형식주의적이며 개념(이론) 본연의 가치를 단편적인 오마주(hommage) 정도로 표현하고 있는 일시적인 경향 정도로 해석함이 타당하지 않을까 한다. 오히려 렌조 피아노와 리차드 로저스의 ‘퐁피두센터’, 프랑크 게리의 ‘빌바오 구게 하임 미술관’, 장 누벨의 ‘루브르 아부다비 박물관’ 등은 몇 안 되는 기호학적 소산의 건축물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다시 말해 공간이란 대상은 건축에서 ‘공간론’이라고 칭할 수 있을 만큼 내부적으로 적층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지만, 장소, 기호, 시간이란 대상은 무성한 논의에 비해 건축의 직접적인 행위 대상으로 확인하기는 쉽지 않으며, 최소한의 개연성의 흔적조차 발견하기 힘든 대상이다.

그렇다면 공간이란 대상만이 건축의 고유한 대상인가? 물론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직관은 충분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현상은 왜 발생하는 것일까? 아마도 이러한 현상 혹은 경향의 배경에는 이미 건축이란 대상 자체가 우리가 인지할 수 있는 기존의 사유체계와 전혀 다른 대상으로 옮겨가지 않았을까 하는 추론이 가능할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시뮬라크르’라는 개념을 비롯하여 후기구조주의 담론을 포함한 들뢰즈적인 사유체계로 이미 전이되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장면(Scene #1)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우리가 행복한 상상의 장면이라고 설정한 장면(Scene #1)은 일종의순간’, ‘찰나’에 대한 이미지들이다. 대중은 비전문가라서 건축적인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문화라는 현상 속에서 이미 살고 있으므로 당연히 문화적인 속성과 문화적인 관점에서 이야기할 뿐이다. 다시 말해 우리의 일상 자체가 이미 문화라는 범주로 흡수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과거 건축가가 말하던 방식의 건축적 언어는 문화라는 범주에서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 언어이다. 앞서 언급한 원근법과 X, Y, Z축이란 가상의 공간 체계 속에서 건축적 대상을 표현하고자 하는 방식은 문화라는 범주에서 그다지 의미 있는 방식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장면(Scene #1)의 묘사는 지극히 순간적임과 동시에, 지속적 혹은 연속적이지 않으며, 어떤 형상을 추종하는 것은 더욱 아닐 것이며, 특정한 자기동일성을 추구하는 것과도 무관한 방식이다. 이러한 관점을 다름 아닌 ‘시뮬라크르’라고 할 수 있으며, 들뢰즈적인 표현으로 ‘사건’이며 ‘특이성’ 혹은 ‘특이한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림입니다.

원본 그림의 이름: mem000023480002.tmp

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1262pixel, 세로 1683pixel

프로그램 이름 : Google

작가미상, 이탈리아 피엔차
사진출처 : 비온후풍경


더불어 들뢰즈는 ‘시뮬라크르’를 ‘물체의 표면에서 발생하는 사건’으로 설명하고 있다. 다소 이해하기 힘들지만, (앞서 베르그송과 연계된 관점에서) 의미 작용을 하는 주체는 존재하지 않음으로 (기억은 뇌에 저장되는 것이 아니다) 맥락적 관점에서 물체의 경계 어디쯤에서 작용한다는 논리는 역설적이지만 합리적일 수 있다. 그리고 ‘철수가 대학생이 되었다’라는 것은 일종의 ‘사건’으로, 여기서 사건 자체는 응당 ‘비물질적’이다. 다시 말해 ‘사건’은 (비물질적인 것들은) 물체의 표면에서 발생한다고 하는 것이다.***

*** 이정우 저, 『시뮬라크르의 시대』, p.111, p.116, 거름, 2002

현재의 건축 외적인 환경은 건축가들이 전통적으로 인지하고 있던 건축 외적인 환경과는 질적으로 다른 차원에 머물고 있음을 인지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장면(Scene #1), 장면(Scene #2), 장면(Scene #3)…. 등 다양한 장면들의 연속적인 관계를 구성하는 것만으로 집이 되고 건축이 되는 시대라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 설정은 영화의 제작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은 방식인데, 이미지들의 차이와 반복, ‘시뮬라크르’적인 순간적인 사건의 계열화만으로도 영화는 의미를 생성하고 있다. 다시 말해 비물질적인 가치 중심의 시대인 것이다.

장면(Scene #1)을 건축적인 해부학의 잣대를 적용할 때 파악할 수 있었던 공간, 장소, 기호, 시간이라는 대상은 건축의 근 현대적 역사 속에 있었던 이론, 비평 등의 논의 체계와는 확연히 다른 사유체계로서의 대상이라는 점이다. 비록 공간, 장소, 기호, 시간이라는 동일한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고 해서, 그 개념 또한 동일할 것이라는 것은 생각은 착각이다.

일반 대중은 이미 문화라는 새로운 가치 체계로 이미 편입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일반 대중은 존재론적 가치를 탐구하는 일상을 살아가는 시대를 지나, 영화와 같은 다분히 ‘시뮬라크르’적인 대상에 공감하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환경에 살고 있다. 예술은 물론이고 인간의 사유 자체도 물질적인 표면에서 생성되는 개념으로 (들뢰즈에 의해) 치환되었으며, 양자역학이란 과학의 선두 주자 역시 과학조차 물질이 아닌 비물질적인 대상일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리고 ‘시뮬라크르(Simulacre)’로 환원되지 않은 인간에게 남은 유일한 신체조차도 DNA 복제기술과 인공지능에 의해 로봇과 같은 기계로 치환되어 신체 또한 비물질적인 대상으로 대체될 수도 있는 혁신적인 시대를 코앞에 직면하고 있다.

하지만 설령 모든 것이 비물질적이고 ‘시뮬라크르(Simulacre)’로 대체되더라도 가장 마지막까지 환원되지 않은 대상으로 남아 있는 것이 인간의 신체(몸)일 것이다. 그리고 환원되지 않은 신체가 존속하는 한 건축은 신체적 거주성이나 물질성을 전적으로 소거할 수 없는 특이한 대상***

***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 장 누벨(Jean Nouvel) 저, 배영달 역, 『특이한 대상 건축과 철학』(Les objets singulier – Architecture et Philosophie), 동문선, 2003 中 역자 후기 강혁, p.149

으로 남아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한다. 왜냐하면, 신체성이 환원되지 않는 한 우리의 신체는 끊임없이 “적당한 햇살이 비치는 어느 날, 처마 아래 목재 데크(Deck)로 마감된 테라스에서, 마주하고 있는 정원에 진달래가 있다면 두견화와 더불어 커피 한잔 마실 수 있는 장면”을 갈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의 삶에서 중요한 것은 ‘순간’이며 ‘사건’이고, 건축은 신체와 더불어 (가장 가깝게) 물질의 경계(표면)에서 부유하고 있는 대상이다.



아뜰리에 비온후풍경 / OGL Architec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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